1991년 레리 홈즈의 복귀전인 앤더슨전의 승리후 포스트 파이트 인터뷰는 처음에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잊혀질 뻔했던 이날 밤은 이전에 홈즈에게 패한 바있는 트레버 벌빅이란 헤비급 선수에 의해 여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인터뷰에서 홈즈는 벌빅이 자신은 존중하지 않는다며 리매치를 거부했고, 이에 대한 대답으로 벌빅은 복싱역사에 길이남을 장문의 욕설을 쏟아냈다. 자연스럽게 이에는 사고가 따랐다.
레리는 사람과 차량을 넘어 벌빅에게 달려들었고, 펀치와 킥을 선물했다. 벌빅은 길가로 도망쳤다.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벌빅이 마침 도착한 경찰에 무슨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던 중 레리가 차를 뛰어넘어 벌빅에게 플라잉 킥을 날렸다. 이 장면이 남은 비디오 테잎은 레리 홈즈가 남긴 어떤 복싱 레코드보다도 팬들의 기억에 남는 순간이었다.
놀랍게도, 경찰이 바로 옆에있는데도 벌빅에게 날라차기를 날렸던 레리홈즈는 폭행죄를 모면했다. 살다보면 때론 이런 일도 있더라.
웰더급 챔피언인 워커를 상대로 15라운드 판정승을 가져간 그날 심상치 않은 전조와 함께, 그렙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해리 그렙의 경기 후 파티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터프한 싸움을 마치면 훈련도 게을리하고 늦지감치 스포츠를 카를 타고 복싱짐에 놀러다니곤 했다. 그가 늦은 밤 맨하탄의 한 나이트클럽에 아리따운 여자를 한 팔에 안고 나타난 것은 이 업계의 사람들에게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으려고 했는지. 워커도 그날 그의 애인과 함께, 같은 장소에 있었다. 아래는 당대의 작가인 피터 헬러가 전하는 워커 편에서의 이야기이다.
"워커의 말에 따르면 말이지, 그와 해리 그렙은 술은 좀 마시다가 같이 떠났어. 클럽을 나와서 워커가 그렙의 스타일에 대해서 좀 조롱하는 식으로 말을 했는데. 그렙이 발끈해서 16라운드는 스트리트 파이팅으로 하자고 했다는거야. 그래서 해리가 코트를 벗고 있는동안 워커가 번개같이 달라들어 그의 인생에서 베스트 펀치를 날렸다지. 그 순간 경찰이 와서 말렸다는군. 주변엔 팻 케시 라는 이름의 경찰 말고는 아무도 없었고. 누구도 자신이 길거리에서 벌어진 2차전에서 승리했는지 전해줄 사람이 없었다고 하더라고. 말그대로 발라버렸다고."
이 이야기의 진위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의심받고 있다. 하지만 그 일이 있은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이 스포츠계의 자유인인 해리 그렙이 사망했지. 누구도 이 남자를 막지 못했어... 무려 1926년의 병원 수술이 그의 빛을 꺼뜨리기 전까지 말이야... 그는 당시에 32살에 불과했지...
프레이저 vs 알리 2차전을 앞두고 동반 출연한 어느 TV쇼에서 이 두명의 거인은 역사적인 1차전을 함께 감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말싸움이 시작되었다. 알리가 먼저 프레이저를 '무식한'이라는 표현으로 선공했고 이는 프레이저의 두눈에 불꽃이 일도록 만들었다.
"왜 내가 무지하다고 생각하지?" 프레이져가 알리에게 물었고 자리에서 일어날 것을 요구했다. 두 선수의 캠프가 촬영장으로 난입했고 그 중에는 알리의 형제인 라만도 있었다. 프레이저가 그를 보고는 "너도 한패냐?" 라고 물었을때 알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프레이저의 목을 감고 둘은 바닥을 구르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프레이저는 바로 자리를 떠났고 알리만이 남아 쇼호스트인 코셀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알리는 이후 프레이저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에게로 다가왔을 때 그가 무었을 하는지 잘 몰랐다고 말했다.
1988년 마이크타이슨은 500만 달러의 캐쉬를 댓가로 프랭크 브루노와 싸우기로 되어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타이슨은 Mitch "Blood" Green을 할렘가의 한 부띠끄에서 아무댓가 없이 두들겨 패주었는다. 스포츠일러스트레이트지의 팻펏남은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타이슨의 다른 복싱경기들과 마찬가지로 지난주의 사건은 아주 빨리 마무리되었지. 한방, 그들이 그러더라고, 타이슨의 라이트어퍼가 전-헤비급 컨텐터인 미치 그린의 왼쪽 눈에 적중했고 눈이 코옆까지 팅팅 부어올라서 5바늘을 꿰매야했다지 뭐야. 이 때 시간이 새벽 4시 반이었는데 누구도 이 시간에 이런 장소에서 악명높은 헤비급챔피언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마이크 타이슨은 이와 다르게 말하고 있다.
"그린이 자신을 향해 돈킹에 대한 난폭한 폭언을 퍼부었고 먼저 내 가슴께를 쳤지. 난 열받았고. 내 기억으론 내가 그의 눈가를 한 방 쳤던 것 같아. 난 불안했고, 무서웠어. 난 지난 7년동안 거리에서 주먹을 휘둘러 본적이 없다고."
이는 그린과 타이슨의 2차전 격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1986년 이미 이 둘은 링에서 격돌한바 있고 10라운드 판정으로 타이슨이 승리를 가져갔는데 이 경기가 비등비등한 싸움은 아니었지만. 이 경기로 그린은 타이슨을 상대로 판정까지 버틴 2번째 선수가 되었다.
그린은 리매치와 함께 폭행관련 소송을 동시에 진행했으나 그린은 4만 5천불을 배상 받았을 뿐 이 둘 모두가 잘 진행되지는 않았다. 14년이 지난 이후의 인터뷰에서도 그린은 타이슨과의 3차전을 요구하고 있으며, 타이슨 같은 건달은 자신을 무서워하고 있다고 떠들고 있다.
6. Yankee Sullivan vs. Tom Hyer (1848, 1849)
1849년 메리랜드의 동부해안에서 양키 설리번과 톰 헤이어의 대전이 만달러의 상금을 걸고 치러질 예정이었다. 100 명이상의 매리랜드주 경찰이 이 경기를 아주 혐오스러운 쇼라는 이유로 개최를 막고자했고 풀 아일랜드에서 이 경기가 개최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경찰들은 스팀보트에 몸을 실었다.
이 과정에서 엉뚱한 사람을 파이터로 착각하고 잡아가는 등 여러 촌극이 연출되었느데, 추적도중 경찰을 실은 배는 해단 사구에 얹히고 말았고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경찰들은 구조를 기다려야만했다.
이 경기는 모던 복싱의 발상과도 같은 경기였다. 겨우 155파운드짜리 땅꼬마 아이리쉬맨 설리번은 진정한 파이오니어였다.
맨하탄의 바에서 이름을 날리던 아메리칸 베스트 복서 헤이어는 경기 초반 설리번을 우습게 다운시켰고 이는 이 역사적인 경기를 더 절정으로 몰아갔다.
급조된 경기장에서 하이어는 설리번은 16분이란 지옥같은 시간동안 쉴새없이 두들겼지고 더 크고 강했던 헤이어는 설리번은 링바닥에 눕혔다. 당시 뉴욕헤럴드 기사를 보면 헤이어의 경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설리번이 링을 떠난 직후 헤이어는 설리번의 세컨에게 다가가서 펀치를 날렸다. 몇몇이 리볼버를 헤이어의 머리에 들이대고 나서나 헤이어는 더 이상의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았다.
복싱 경기 프로모션에 네셔널리즘과 인종적인 코드가 활용된 것은 오랜 역사를 지닌다. 홉킨스 vs 트리니다드의 경기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프로모터인 돈킹은 이 경치를 마치 미국과 푸에토리코와의 전쟁처럼 묘사했다.
인종적 긴장은 이러한 상황에서 극에 달했고 홉킨스가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푸에토리안 깃발을 뽑아 바닥에 내던진 사건으로 갈등은 폭팔했다. 트리니대드의 캠프엑서는 분개했고. 그가 푸에토리코령 산 주안에서 같은 행동을 반복했을때 홉킨스가 살아서 그곳을 탈출할 수 있엇던 것은 다행인 일이었다. 하지만 항상 자신은 하버드에 가지 못했고 대신 감옥에 갔다왔다고 말하는 홉킨스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다. 트리난드가 먼저 교정시설의 물건 따위를 자신에게 던져댔으며 옆에서 돈킹이 푸에토리안 기를 흔들고 있었을때 참을 수 가 없었다고.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라 말한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뉴욕시에 테러가 발생했고. 이 두 선수는 NYPD의 관찰하에 지내게 된다. 그 때부터 이 두선수는 갑자기 이성을 찾은 사람인듯인냥 행동했다.
4. Chief Baby Miller vs. Chino Alvarez (1936)
에베리오 헤르난데즈는 하프-아메리칸인디언으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시대에 태어나 안타깝게 뭍혀졌다.
하지만... '베이비 밀러'라니?
그가 왜 이런 칭호를 얻게 되었을지는 미스테리이다. 그는 Dixie Kid, Mutt Griffin, Moon Mullins and Tootsie Bashara와 같은 당대의 최고의 선수들과 결투를 벌였고 이들은 1930s의 진정으로 최고의 파이터들이었다. 더 나은 이름이 있는가? 어디 한번 대보시라.
치노 알바레즈는 그 평범한 이름과는 달리 다른 파이터들의 악몽에 나타났을 법한 그런 선수였다. 베이비 밀러와는 1차전에서 NC 그리고 이어지는 연전에서 각각 10라운드 디시전 승을 사이좋게 한번씩 나누어가졌다.
그 두 선수의 1차전에서 알바레즈는 3라운드 공이 이미 울린 상황에서 밀러를 넉아웃 시켰고 원래는 실격패 될 예정이었으나 캠프의 항의로 NC로 결정되었다. 당연히 밀러는 이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았고 이 사건은 Ybor City의 길거리에서 비공식적인 경기를 가진 계기가 되었다.
The Evening Independent지에 의하면 경기 이틀후 밀러가 Tampa Bay 거리에서 알바레즈에게 도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알바레즈는 링에서 2차전을 가지기를 원했다고 한다. 아래는 사건의 전말이다.
"알바레즈와 밀러의 지지자들은 폭동의 선수에 섯다. 칼날이 번득였고 알바레즈의 편에서 총을 꺼내 밀러를 향해 발사했다. 총알을 가까스로 피한 밀러는 건맨에게 다가가 그를 넉아웃 시켰다. 경찰이 출동했고 군중은 강제로 해산햇다. 밀러와 알바레즈는 각자 도망치기에 바빴다.
3. Daniel Mendoza vs. Richard Humphreys (1787)
다니엘 맨도사는 영국의 유대인 땅꼬마 였고 고작 5.7피트의 키와 160파운드의 무게로 거리에서 싸움하는 법을 일찍부터 배웠다.
그 시절의 복서들은 상대의 정면으로 서서 상대에 쇄도하는 펀치를 날리는 단순한 스타일이었다. 이 시대의 맨도사는 "the father of scientific boxing"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한다. 그는 스텝으로 앵글을 만들고 거리싸움을 하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기술적 발전을 만들어냈다. 이는 단순히 힘만으로는 단성할 수 없는 것이었다.
훗날 영국 국왕의 후원을 받게되는 이 링위의 신사가 거리에서 그런지 파이팅에 휘말렸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훗날 멘도사는 젠틀맨 박서라고 불리는 그의 멘토였던 리처드 험프리와 결별하게되는데 멘도사는 이 과정에서 험프리가 그다지 젠틀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험프리는 스폰서와 자존심 등등의 이유로 자신의 제자나 다름없던 멘도사를 경멸했고 모욕했다.
다음번 그 둘이 마주쳤을 때일어났던 일은 멘도사의 자서전을 빌어 서술하고자 한다.
"Cock Tavern에서 나와서 군중에 둘러쌓여 싸움을 하게되었지. 링이 즉석해서 만들어졌고 몇 번의 공방이 오고간 후에 나는 내 상대의 눈을 감기게 만들었어 이후 몇방은 험프리의 얼굴에 심한 멍을 남겼고 때마침 도착한 경찰들이 우리를 떼어놓았지.
이 싸움에 대한 소식은 전국으로 퍼져서 그들은 마침내 공직적으로 경기를 가지게 되었다. 1788년 무려 6만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경기는 시작되었다. 경기시간 28분이 경과된 즈음 멘도사가 젓은 나무조각에 발목을 다치는 사고가 발생한다. 험프리는 이를 두고 차후 "내가 그 유대인자식을 손봐줬지"라며 조롱했고 그깟일로 경기를 그만두는 것은 겁쟁이들이나 하는짓이라 멘도사를 평했다.
이 두명의 파이터는 이후 2번 더 링위에서 만났고 이 경기들은 프로스포츠로서의 복싱이 태동하던 시기에 복싱의 인기를 짐작케하는 지표로 남았다.
파이터들의 피가 끓어오를 때 말 몇마디가 총질로 또 체포까지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데릭 치소라? 그의 피는, 아마도, 상시 펄펄 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치소라에게는 힘든 주였다. 웨이-인 행사장에서 비탈리의 뺨을 때려 명성과 그의 지갑에 손해를 입었다.
"그는 작은 여자아이처럼 제 뺨을 때렸습니다." 비탈리가 미디어 컨퍼런스에서 말했다.
기도 죽지않고, 일전에 사건에서의 교훈도 잊었는지 치소라는 글리츠코와의 경기에서 원사이드하게 지고는 글리츠코의 코너에 입에 머금고 있던 물을 뱉어냈다.
놀랍게도 방금 언급한 두 사건은 우리의 리스트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더 심한 사건은 경기후 데이비드 헤이이가 링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을때 일어났다. 글리츠코의 승리로 그의 캠프는 신이났지만 치소라는 그렇지 않았다. 특히나 헤이가 그를 '루저'라고 불렀을 때 치소라는 폭발했다.
"내 면상에 대고 다시 말해봐, 내가 지금 내려가니까 내 얼굴에대고 말해" 치소라는 소리쳤다.
그 이후의 장면은 말그대로 혼란 그 자체였다. 유리병, 그리고 카메라 삼각대 주먹, 발 등등이 날아다녔다. 무척이나 화가난 치소라는 하지만 더 큰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절 유리병으로 찌르려고 했어요. 신께 맹새합니다. 데이빗 너를 쏴죽이겠어" "너를 쏴죽이겠어. 바로 내가 물리적으로 죽여버리겠어 데이빗 헤이" 치소라가 소리쳤다.
치소라가 건물밖으로 끌려나갔을 때 헤이가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너 지금 4연패야 병신아" 이는 치소라가 3연패 중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5개월 뒤 치소라와 헤이는 공식 경기를 가졌고 헤이가 5라운드 넉아웃 승을 거두엇다. 이후 그 둘은 악수와 포옹으로 화해했다.
헤비급 챔피언인 레녹스 루이스의 보디가드라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인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타이슨을 만나는 날이거나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레녹스 루이스의 보디가드인 앤쏘니 핏이 다음 상황에서 패닉에 빠진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루위스가 보디가드까지 필요했을까? 건샷? 아니면 그리즐리 곰의 습격?
그날은 앤써니 핏에게는 불행한 날이었다. 포머-헤비웨이트 챔피언인 마이크 타이슨은 그날 위협적인 올블랙 의상을 입고 화가난듯한 걸음걸이로 프로모션 컨퍼런스에서 루이스에게 다가섰다. 핏이 이를 막아보고자 앞으로 나섰으나 그것은 그의 실수였다. 타이슨은 핏을 바닥으로 떨어뜨렸고, 소동이 시작되었다.
타이슨은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그에게 다가선거는 경기 잘해보자는 의미였다고, 그건 경기전부터 양 캠프가 동의한 사안이었고. 멍청한 보디가드녀석이 겁먹고 나를 밀치는 바람에 일이 벌어졌고 레녹스가 나안테 라이트를 날리게 된거지"
이 증언에 의하면 타이슨은 적어도 이 사건의 시발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상황을 악화시키는데 특별한 재주가 있다. 뉴욕타임즈 기사 보도에 의하면 루이스의 캠프는 폭행 혐의로 타이슨을 고소한다고 보도했다. 아래는 기사의 일부이다.
"타이슨은 루이스의 다리를 물었다. 루이스의 비지니스 메니저인 에드리안 오군에 의하면 루이스의 상처는 그의 오른쪽 무릎에 작게난 반쯤 베이물은 딸기같은 자국이 났다고 묘사한다. 타이슨이 옷을 뚫고 상처를 냈고 루이스는 곧 바로 지역 병원에 가서 감염여부를 검사했다고 한다. 타이슨의 메니저에 의하면 이는 날조된 주장ㅇ이며, 타이슨은 거리에서 상대를 물거나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경기는 성사되었다. 처음에 네바다주에서 개최되기로 계획되었던 경기는 타이슨의 폭행혐의를 참작하여 라이센스를 내주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고. 결국 경기는 멤피스에서 열리게되었다. 그 날 밤 루이스는 타이슨을 8라운드에 넉아웃 시켰다.